고흥류씨 역사고흥류씨 개요
고흥류씨 개요
제목 고흥류씨의 역사
작성자 관리자 [2024-03-25 11: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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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류씨(高興柳氏)는 고려 개국 후 흥양지방의 호장(戶長)이었던 류영(柳 英)을 시조(始祖)로 하고, 그의 7세손 청신(淸臣 : 지추밀원사 승무의 아들)이 고려 충선왕(忠宣王) 때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거쳐 삼한삼중대광 도첨의 정승(三韓三重大匡都僉議政丞)에 올라 고흥부원군(高興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관향(貫鄕)을 고흥(高興)으로 하게 되었다.

 

가통(家統)을 이은 인맥(人脈)으로는 청신의 손자 장(莊)과 탁(濯), 준(濬)이 유명했다. 예빈윤(禮賓尹) 천(洤)의 아들인 장(莊)은 고려 말 어지러운 정국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부모와 함께 천안(天安)으로 내려가 일찍이 할아버지 청신이 원(元)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갔다가 얻어온 호두(胡桃) 번식을 적극 장려하여 오늘날 호두는 천안의 명물(名物)이 되었으며, 판밀직사(判密直司) 유기(有奇)의 아들로 고려 말에 기재(奇才)로 많은 일화를 남겼던 탁은 <장생포곡(長生浦曲)>을 지어 악부(樂府)에 올렸다.

 

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 창업에 공을 세웠던 준(濬)은 조선이 개국되자 검교참찬 문하부사로 고흥백(高興柏)에 봉해졌으며 정종(正宗) 때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치사(致仕)하였다.

 

한편 맏아들 습(濕)은 태종(太宗) 때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예(禮), 형(刑), 병(兵), 이조(吏曹)의 전서(典書)를 역임했고 세종조(世宗朝)에서는 우군원수(友軍元帥)가 되어 대마도(對馬島) 정벌에 공을 세웠으며, 그의 증손 충서(忠恕)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권 율(權 慄)의 막하에서 무공(武功)을 세우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책록되어, 대를 이어 가문을 명문의 위치로 올려놓았다.

 

어영대장(御營大將)으로 구월산(九月山) 적(賊)을 토벌하여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오른 세웅(世雄 : 효백의 아들)은 흥양군(興陽君)에 봉해졌고, 「어우야담(於于野談)」으로 유명한 몽인(夢寅)은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조선(朝鮮) 중기의 설화문학(設話文學)의 대가(大家)로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역모(逆謀)의 누명을 쓰고 <상부사(孀婦詞)>라는 시(詩)로 인하여 아들 약(瀹 : 형조, 공조 좌랑을 역임)과 함께 죽음을 당했다.

 

그밖의 인물(人物)로는 임진왜란 때 한산도(閑山島) 싸움에서 전사하여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에 책록된 의신(義臣)과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의병(義兵)을 이끌고 한마교(汗馬橋)에서 전사한 춘필(春苾)이 유명했고 <일문삼의사(一門三義士)>로 일컫어졌던 경인(景仁), 성인(成仁), 극인(克仁)은 정유재란 때 무공(武功)을 세워 고종(高宗) 때 명정(命旌)되어, 칠산양(七山洋)에서 일가족이 순절한 익겸(益謙)과 함께 충절(忠節)의 가통(家統)을 이었다.

 

그외 형제 호당(湖堂)으로 이름났던 숙(潚)과 활(活)은 부정(不正) 몽표(夢彪)의 아들로서, 형인 숙은 대사간(大司諫)과 형조참판(刑曹參判)을 역임하고 영주군(瀛州君)에 봉해졌으나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광해군(光海君)의 심복이었다는 죄목으로 청하(淸河)에 위리안치되었으며, 동생 활은 경기도사(京畿 都事)를 지냈다.

 

숙의 증손 종흥(宗興)은 숙종 때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가 거론되자 선비들을 이끌고 대궐에 들어가서 그 부당함을 주장하여 회심소(回心疏)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산속으로 들어갔다.

 

조선말 학자이자 의병장으로 이름을 날린 류인석은 고흥류씨가 배출한 근대 인물이다. 

그는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문하의 유생들을 이끌고 상소하고 의병대장이 되어 항일 투쟁에 앞장섰다.

3.1운동 때의 류관순도 고흥류씨를 빛낸 인물인데 철종(哲宗) 때 가재(家財)를 털어 흥호학교(興湖學校)를 설립했던 독립운동가 중권(重權)의 딸인 그는 충남 천안 출신으로 이화학당에 입학했으나 일제 탄압으로 학교가 문을 닫자 고향으로 내려와 독립만세 시위를 본격적으로 계획하였다. 1919년 3월1일 아우내 장터에서 수천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시위를 하다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7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옥중에서도 만세를 부르며 동지들을 격려하다가 옥사하였다.

그외에도 고종 때 척양척왜(斥洋斥倭)를 강렬하게 주장했던 중교(重敎)와 항일투쟁에 불구가 되었던 홍석(弘錫), 병우(秉禹)는 하동(河東)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일본군(日本軍)의 기관을 습격하다가 중상을 입고 체포되어 단식으로 옥사했으며중화(重和)는 의병대장(義兵大長)으로 80여 명의 동지들과 은진(恩津) 왕성골에서 왜병을 크게 섬멸하여, 성리학(性理學)과 예학(禮學)으로 명성을 떨쳤던 영선(永善)과 함께 명문 고흥류씨를 더욱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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